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당시 일본 문서들을 보면 일부 정치인들의 ‘정한론을 제외하고는 19세기 말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 속에 한국의 식민지화라는 단어를 찾기 쉽지 않다.일본은 새로운 개혁을 위한 모델이었다.
150년이 지난 현재의 역사가들 역시 이 시기를 평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한국 역사학계에서 사회적 관심을 끄는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서 논쟁이 시작되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이는 강대국의 옆에 있는 약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관계였다.
단지 두 조약 간의 차이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강화도 조약에는 없는데.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파시즘과 군국주의하에서 이루어졌던 방식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결국 을사늑약과 강제합병조약으로 귀결되었다.이 1명의 대강도는 다음 중 하나를 결정할 수 있다.
눈앞에 있는 1명의 평가는 중요하다.하지만 실제 실험을 해보면 막상 자기가 돈을 다 가져가는 이기적인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지도 모르는 많은 이의 비난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이럴 때 사람은 관대해진다.